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르스크 전투 (문단 편집) ==== 독일군의 초기 공세 ====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독일 9군이 소련 13군에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독일의 전통인 기갑부대의 돌파 대신 보병에 돌격포를 지원하여 방어선을 돌파한 후 기갑전력을 예비로 투입했다. 모델은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943년의 소련 공군은 이제 독일이 경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루프트바페]]의 [[Ju 87]] [[슈투카]]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400여 대의 소련 전투기가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비록 독일 공군이 여전히 기체의 성능, 조종사 숙련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소련 공군은 이에 맞서 최저한의 기량을 갖춘 수적 우위로 승부했다. 덕분에 독일군은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전면에 공세를 펼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호, 강철 피아노 줄[* 오픈탑 차량에 탑승한 승무원을 공격하는 용도.]지뢰,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소모되기 시작한다. 독일 23군단, 47기갑군단이 고전하는 한편,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양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소련군의 신속한 증원에 진격을 중지한다.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 32보병사단을 섬멸하고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46기갑군단에 의해 방어선이 뚫린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이 또한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돌파당한다. 이렇게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과는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했음에도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독일군은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